최치원
- 자(호)
- 자 고운(孤雲) (호) 해운(海雲)
- 인물유형
- 문인
- 시대배경
- 삼국시대
- 내용
신동(神童)이라고 불릴 뛰어난 재주, 천하를 경영할 경륜도 있을 것 같은 열두살 소년, 그러나 신라에서는 골품제도의 굴래에 매여 아무런 희망도 바랄 수 없는 신분, 그리하여 대당나라로 가는 배를 탔던 것이다. 그리고 만 6년의 세월이 흘러 18세의 젊은 나이에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는 영광을 안으니 신라 경문왕 14년, (A.D.874)의 일이다. 그후 당에서 벼슬길에 올라 직책에 따라 여기 저기 옮기다가 마침 황소의 난을 당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고병(高騈)을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에 임명하여 전국의 병마를 총지휘하게 했다. 평소에 최치원의 학문이 뛰어난 것을 알고 있던 고병은 최치원을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서기의 책임을 맡겼다. 이때, 최치원이 황소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국의 장수들에게 궐기를 촉구하는 글을 썼는데 만고의 명문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의 이름과 저서는 당서예문지(唐書藝文志)에도 실렸는데 당나라 학자 아닌 사람의 이름이 당서 예문지에 실렸다는 것은 예외에 속하며 당에서도 그의 문학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이름을 떨치던 당나라지만 여기서 뼈를 묻을 수는 없었다. 최치원은 그가 연마한 학문과 경륜을 조국인 신라에 바치고자 귀국을 결심했다.
최치원의 너무나도 뛰어난 시문에 대한 재능은 초인간적인, 신화속의 주인공처럼 되어 여러 설화를 낳게 되었다. 우선 출생부터가 신기했다. 최치원의 어머니는 그를 밴지 4개월만에 금 돼지에 납치되었다가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나서야 그를 낳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갓난 아기를 무인도에 버렸으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에 의해서 길러졌으며 그후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 온다. 어릴 때부터 그의 재능은 뛰어나 아무도 당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후 부친께서 세상을 떠나자 최치원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당시의 재상 집에서 일할 궁리를 하던차 마침 그집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일부러 재상집의 거울을 깨뜨리고 그 대가로 그집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재상께서는 재주가 뛰어나고 아름답기도 겨눌 곳이 없는 딸이 있었다. 준수한 얼굴, 빼어난 그 자태, 슬기에 가득한 눈동자……재상의 딸도 평범한 여인은 아니였다. 그런 까닭에 최치원을 바라본 순간 그가 하늘의 뜻에 의해서 지상에 태어난 비상한 인물임을 알아 차렸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최치원은 재상의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 후에 이 현부인의 슬기로 국난을 물리치게 된다.
끝으로 최치원을 위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저서와 작품이 거의 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치원의 작품으로서 어떤 방대한 문집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소위 사산비명으로 불려지는 '쌍계사 진감대사비명' '성주사랑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 봉암사지증대사숙조탑비명, 그리고 경주 숭복사비명'의 비명들이다. 이들 비명은 당대 불교계의 사정등이 요령있게 서술되어 신라 불교와 신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방의 수령으로 전전하던 최치원은 진성왕 8년에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건의했으나 받아 들여지지를 못했다.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조국으로 돌아온 보람도 산산히 쪼개졌다.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산수를 벗삼고 명산에 오유하는 길을 택했다. 이래서 그의 발자취는 전국의 명산에 미쳤으며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유적이 전하고 있는 곳만 해도 경주의 상서장(上書莊), 독서당(讀書堂)을 비롯해서 가야산의 여러 유적, 동래의 해운대, 마산의 월영대(月影台), 함양의 학사루(咸陽의 學士樓), 의성의 고운사(孤雲寺), 지리산의 쌍계사(雙溪寺) 등이 있다.
신라시대의 한문학은 통일말기에서는 당나라를 앞설 정도로 발달되었으며 최치원에 이르러 최성기를 맞게 된 것이다. 최치원에 의해서 사륙병려체(四六騈儷體)라는 화려한 문장의 모습이 갖추어지는데 유학과 도학(道學) 그리고 불교에 이르는 모든 학문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당대 동양에서는 아무도 겨룰 수 없는 위치에 섰던 것이다.
신라는 이미 황혼이요, 고려가 새아침을 만났슴을 알고 있었으나, 충신은 두 왕조를 섬길 수는 없는 일, 비록 글을 올려 고려의 장래를 예언은 했으나 그 이상 도울 수는 없었다. 그 대신 그의 일문과 제자들은 대거 고려조에 진출하여 고려 문운을 개척하게 되었슴은 일이였다.
고려의 현종(顯宗)은 그가 조업(祖業)을 몰래 힘쓴 공을 높이여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고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문묘에 향사케 했으니 우리 나라 한문학의 조종(祖宗)에 대한 대접이 이때서야 이루어 진 것 같다. 옥(玉)은 언젠가는 빛날 때가 있슴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