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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

안향

자(호)
순경
인물유형
장군
시대배경
조선시대

안향(安珦)은 서기 1234년(고려 고종 30) 흥주부 평리(興州部 平里 : 현, 영풍군 순흥면 석교리)에서 순흥인(順興人) 밀직(密直) 부(莩)의 아들로 태어났다.

1260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교서랑(敎書郞)에 오르고 이어 1270년에서 1273년 4년간 삼별초(三別抄)가 개경천도를 반대하여 난을 이르키게 되었는데, 개경환도(開京還都)문제를 애워싸고 서로 대립을 하게 되었다. 원종(元宗)을 중심한 문신도들은 개경으로 환도를 희망하였고, 삼별초 무신들은 그것이 몽고(蒙古)에 대한 굴복이라 하여 완강히 반대하였다.

강화도에서는 중신들이 회의를 열고 개경에 환도할 것을 결의하고, 1270년(원종11년)5월 27일 환도를 강행하였다. 선생은 삼별초파의 방해로 강화도에 머무르게 되었으나, 사태를 판단하여 기화를 타서 개경으로 돌아오니 전보다 더 두터운 옹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원종13년에 감찰어사(監察御使)기 되고, 고려 충렬왕 원년에는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있을 때, 무지한 백성을 현혹시키는 무당의 무리들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1289년(충렬왕15) 원(元)나라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과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어 세자와 공주를 호종하여 원(元)의 서울 연경(燕京)으로 갔을 때, 원의 풍습에 따라 원의 공주를 우리나라 세자와 친하게 하였는데, 원주(元主)가 그의 재상을 시켜 안향에게 묻기를 세자가 그의 공주와 가까이 하지 않음을 핵하니 선생인 말씀하시기를 "궁궐안의 여자에 대한 일은 외신(外臣)이 알바 아니며, 물을바 아니올시다."고 답하니 원주가 감복하여 가상히 여겼다고 한다.

1290년(충렬왕16)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베껴쓰고, 공자 및 주자화상을 원나라에서 모사하여 귀국하였다. 돌아와서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가 되었고, 1294년(충렬왕20) 동남도 병마사(東南道 兵馬使)가 되어, 합포(合浦:지금 마산)에 출진하였으나 곧 소환되어 지공거(知貢擧)로서 주시(主試)가 되고 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298년(충렬왕24)충렬왕이 퇴위하여 태상왕(太上王)이 되고 세자(世子) 충선왕이 즉위하자 집현전(集賢殿) 태학사(太學士)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가 다시 첨의참리(僉議參理)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그해 8월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고 세자 충선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안향은 3차로 이를 호종하여 원에 갔었다.

1303년 국학부흥 운동을 크게 일으키고, 박사 김문정 등을 중국에 보내어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의 초상(肖像) 및 제기, 악기, 경서(經書)를 구해오게 했다. 문인 백이정, 이제현(李劑賢)등을 전후하여 강남(江南)에 보내어 정주(程朱)의 성리서(性理書)와 경서(經書)만여권을 사들여 오도록 했고, 시랑(侍郞) 찬성사(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 감찰사사(監察司事)가 되었다.

1304년(충렬왕30) 교학양현(敎學養賢)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를 두어 초상을 모시고 이산, 이진등으로 경사교수(經史敎授), 도감사(都監使)를 삼으면서, 판밀직사사(判直密司事),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나가시었다.

향년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318년 왕이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궁중에서 일하던 원나라 화가에 명하여 안향의 초상(肖像)을 그려 문묘(文廟)에 봉안하였고 1319년(충숙왕6)문묘에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시면 도덕박문왈문(道德博問曰文) 안민입정왈문성(安民立政曰文成)이라고 금자(金字)로 써서 문성공묘(文成公廟)에 걸어두고 있다. 이 글씨는 명나라 사람 주지번(朱之番)의 글씨라 한다. 회헌 안향은 1542년(중종37)당시 풍기군수 신제 주세붕 문성공 안향의 영정을 모시고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그후 1549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계실 때 창원전말을 경상도 관찰사에 상보하고, 관찰사 심통원이 국왕에게 사액을 계청하였더니 국왕은 대제학 신광한에게 명하였다. 즉, 신광한은 소수서원으로 상헌함에 국왕께서는 소수서원이라는 4자를 사액하였으므로 우니나라 사액서원의 효시인 것이다. 공손 덕성이 안자묘의 현판을 집필하고 안자대전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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