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숙
- 자(호)
- 문좌/심산,벽옹
- 인물유형
- 기타
- 시대배경
- 근대이후
- 내용
선생은 1879년(고종 16년) 7월 10일, 대가면 칠봉동 사도실에서 김오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또는 벽옹, '벽'은 '앉은뱅이 벽'자로 일제의 고문에 의해 불구의 몸이 되어 이런 호를 붙였다. 본관은 의성으로 선조 때 명신, 동강 김우옹 선생의 13대 종손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문장에도 능했다. 면우 곽종석에게 수학, 1903년(광무 7년) 성명 학교를 세워 후진을 가르쳤으며 매국오적청참소와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성토한 죄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고종의 인산에 참예하기 위해 상경,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들이 3·1운동에 참가히지 않음은 큰 민족적 수치라 중망있는 인사를 추대하여 단결된 유림의 이름으로 독립 청원을 할 계획을 곽대연, 이중업 등 동지들과 함께 세워서 거창에 있는 전 의정부참찬 곽종석을 찾아가서 그의 승락을 얻어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한 '한국독립청원장서'를 품에 숨겨 중국 상해로 건너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으로 활약, 1920년,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왜경에게 잡혔다가 출옥되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1921년, 단재 신채호와 함께 독립운동지 천고를 발행하고, 이어 백암 박은식 등과 사민일보를 발간, 자주독립 정신을 고취시키기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 선전 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중국의 손문과 교섭하여 광복운동 자금 57만원을 제공받았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으로 의열단원 나석주에게 폭탄을 주어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하고 중국 정부의 풍옥상과 교섭, 만몽국경수원포두 지방의 간황지 100여만평을 빌어 독립군 양병에 힘쓰는 한편, 주만독립군군사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신병으로 상해 홍제의원에 입원 중, 왜경에게 잡혀 6월 18일, 대구로 압송되어 14년 형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에 복역, 모진 고문으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으며, 1945년, 건국동맹사건으로 왜관경찰서에 구금되어 해방 후 출옥되었다.
해방 후에는 백범 김구와 같은 노선을 취했으며, 1946년 민주의원 의원, 유도회를 조직하고 성균관과 성균관 대학을 세워,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 성균관장, 성균관 대학 초대학장을 지냈다. 6·25 사변 후 1951년 이승만 대통령 하야경고사건으로 40일간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자유당 정권의 부정불의를 국민들에게 일깨워주었다. 1952년, 정치 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 김성수, 조병옥 등과 국제구락부사건을 주모하여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 테러를 당했다. 1953년, 종합 대학, 성균관 대학 총장, 1957년 총장을 사임하고, 1960년 백범 김구 선생 및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 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을 받고 그 해 5월 10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노환으로 별세, 사회장을 지냈다.
1974년, 군청 뒤에 심산 기념관이 세워지고 그 앞뜰에 심산 김창숙 선생 사적비를 세웠다.